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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A M P L E

 아마도 이재규가 다녀온 곳은 병원, 이재규가 얻은 것은 수면제일 것이다. 수신고 학생들을 특별 취급하여 약을 처방해준다는 그 병원을 치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니 이재규가 얻어온 것이 수면제라는 것은 당연한 유추였다. 그리고 요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은 수면제 덕에 꽤나 만족스러운 잠을 자기 때문일 것이다. 이재규를 괴롭히던 건 불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뿐일까? 라는 생각이 치훈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치훈은 김진수가 떨어진 동관과 묘사된 위치가 맞지 않는 편지 내용의 오류를 유추했던 때처럼 몸을 의자에 기대고 두 손바닥을 마주 댄 채 생각했다. 이재규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불면증이 시작된 시기는 아마도 방학이 끝나고 난 직후. 단순히 방학이 끝나서가 아니라 김요한의 그 일 때문이겠지, 라는 추리를 하다가 치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다. 김요한 때문이 아니다. 김요한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재규가 수면부족으로 쓰러지고 그걸 바로 발견한 건 치훈이었다. 재규를 양호실로 데려가고 깨어날 때까지 옆에 있어준 것도 치훈이었다. 치훈은 자신이 왜 그렇게 재규에게 신경을 쓰는지 알지 못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그냥 그러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재규가 그냥 잠을 못 잔다고, 자꾸 악몽 같은 것을 꾼다고 했을 때 치훈은 충동적으로 그거, 나 때문이냐? 잠 못 자는 거. 라고 말했었다.

 

 “…….”

 

 그때 왜 그걸 물었을까. 처음부터 이재규가 대답을 하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으면서. 치훈은 아직까지도 제가 왜 이재규가 잠을 못 자는 이유가 저 때문이라고 말하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단 심정이었다. 치훈은 답답함을 느꼈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치훈은 천재였기 때문에 간혹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언젠가는 답을 찾아냈다. 그것도 대부분은 어려움을 느끼기도 전에 문제를 풀 때가 다반사였다. 한 마디로 지금 상황은 치훈에게 굉장히 드물고도 낯선 상황인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전혀 답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치훈은 재규가 잠을 못 자는 이유엔 분명 저도 포함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그걸 입증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그랬다. 그러한 확신 때문에 치훈은 굳이 자기를 적대시하는 강미르에게 찾아가 부탁까지 한 것이다. 물론 치훈이 계획한 일이 실패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다만 치훈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로 자꾸만 가슴이 갑갑했다. 아마 이재규는 제 말을 듣고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건 높은 확률로 나쁘게 될 것이 뻔했다. 치훈은 그걸 알면서도 '무슨 짓'을 하고야 말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의 가설이 맞아떨어질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갑갑한 거였다. 치훈은 이런 답답하고 거북한 마음이 미안함이라는 것을 끝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중략)

 

 피곤하다. 재규는 얼른 자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약통의 뚜껑을 열고 수면제를 손에 털었다. 한 개, 두 개, 서너 개가 나오더니 곧이어 하얀 알약들이 재규의 손바닥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재규는 수면제의 개수를 세지 않았다. 기계마냥 약을 손에 쏟고 그것을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물 한 모금을 마셔 입 안의 약들을 깨끗이 삼켜냈다. 다음은 칼을 쓸 때였다. 사실 재규는 제가 무슨 생각으로 몰래 칼을 가져왔는지 잘 몰랐다. 충동적으로 갖고 오긴 했는데 아마도 안 쓰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치훈의 말을 듣고, 자꾸만 꿈에 나타나던 그 사람의 고통스런 모습이 선명해지고. 재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자고 싶은데 잘 수도 없었다. 죽고 싶다거나 뭐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재규는 잠을 자고 싶었다. 칼을 어설프게 쥐고서 재규는 또 웃었다. 참 웃기다. 언제 그렇게 수면에 집착했다고 이리도 잠자는 것을 그리워하는 걸까. 최근의 자신은 마치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것처럼 잠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치훈에게 느끼는 갈증과 아주 흡사했다. 그리고 드디어 재규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이제는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미안해. 좋아해서 미안해. 김진수의 죽음에 들어가 있는 너는 날 눈앞에서 지워버렸고. 라는 죄목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재규는 그저 방학이 끝나기 전 치훈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목울대에서 끓어 올라오는 울음을 삼키느라 재규의 입가는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내 멋대로 네게 희망을 품어서 미안해. 그리고 내 멋대로 절망해서 미안해. 나는 네가 내 구원인 줄 알았어.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어. 내가 순진하지 않았다고 말하진 않겠다. 순진한 이재규는 우리에게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 아니, 제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편지를 버렸다고 말하고 편지를 왜 보냈냐고 딱딱한 추궁을 하는 최치훈을 보며 재규는 철저하게 절망했다. 그랬다. 나는 너를 오해했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사람이라 오해했다. 결국 재규의 눈에선 눈물이 나와 볼을 지나 턱 끝에 맺혔다. 

 

 왼쪽 손목에 닿은 칼날은 서늘했다. 재규는 이를 꽉 물고 오른손에 힘을 실었다. 칼날은 하얀 살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러나 고작해야 흐릿한 상처를 내고 말 것이라 생각했던 재규는 자기도 모르게 손목을 긋는 것이 아니라 찢어내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손목 안쪽은 검붉은 피로 범벅이었다. 살갗이 두꺼운 종잇장 갈라지는 마냥 찢기는 순간 재규의 얼굴에 피가 형편없이 튀었다. 그리고 때마침 약기운이 마구 돌기 시작했다. 재규의 몸은 비틀비틀 위태롭게 흔들렸다. 휘청거리는 재규의 영혼처럼. 토할 것 같이 졸리다. 몸이 점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영원할 것처럼 잠이 쏟아진다. 아니, 영원했으면 좋겠다. 이대로 눈을 감고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재규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재규는 제가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으로 추락하기 직전 재규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재규. ……죽지 마. …아, 최치훈. 내 빛. 내‥ 내 지긋지긋한 빛. 긴긴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다 갑자기 밝은 빛을 보면 사람의 눈은 갑작스런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멀어버린다 들었다. 내 생은 여태까지 기나긴 터널 같은 어둠이었으니, 만약 그 터널의 끝에 빛을 보고 내 눈이 영 멀어버린다면 내가 마지막에 보는 것은 너였으면 좋겠다. 내 눈을 멀어버리게 하는 빛은 너였으면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재규는 깨달았다. 사랑이 이렇게 끔찍하고 숨 막히는 거였다면 시작조차 하지 말 것을 그랬다. 어리고 어리숙하고. 미련한 이재규는 빛과 어둠이 한 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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