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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A M P L E

 토니의 천성에 사랑이 곧 구원이라는 말은 얼토당토 안 한 말이었지만 내심 페퍼와의 연애로 자신의 삶이 어딘가 긍정적 가변성을 가지리라고 기대를 한 건 사실이었다. 토니의 기저에 깔린 것은 하워드로부터 비롯된 애정 결핍이 대다수였다. 그걸 천재적인 두뇌와 화려한 말빨과 천문학적인 재산으로 감춰왔을 뿐이었다. 위에 언급한 것들만으로도 토니는 충분히 세간의 이목을 사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애정결핍 환자다? 더 이상의 가십거리를 던져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처는 숨기고 덮어씌울 때보다 대놓고 보여주고 광고를 해야 치료될 때가 많다. 그 사실을 모르고 40년을 살았다. 40년 동안 숨긴 비밀을 이제 와 꺼낼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정말 자신은 페퍼와 연애를 함으로서 이 모든 게 깨끗해지리라 믿었던 걸까. 사랑은 구원과 같다고 하는 말을 실은 믿고 싶었던 건가. 토니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말도 안 되지. 세상에 그런 건 없어.

 그래도, 토니는 자신이 소유하는 것 중에 하나쯤은 온전한 관계가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페퍼와의 연애는 그런 의미에서 대실패였다. 페퍼가 이런 관계는 그만하자고 말했을 때 토니의 담담한 표정은 가면이었다.  토니는 그 때 처음으로 제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이런 관계, 즉 정상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연애 그 비슷한 것은 두 번 다시 하지도, 해보려 시도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만 알고 남은 알려고 하지 않는 남자에게 평범하고 고요한 연애란 사치였다. 기실 평범한 삶과 남들 다 하는 연애가 자신에게 사치란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건 두 번째였다. 제일 중요한 건 토니 스타크의 평범한 삶이라고 포장된 틀 안에 갇히는 재수 없는 불특정다수가 입게 될 상처였다. 자신이야 늘 깨지고 다치고 비난 받고 비판 받는 것에 익숙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토니가 평범하게 엮이고 싶은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누구나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페퍼 포츠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솔직히 말해, 토니는 페퍼와 짧은 시간이나마 연애를 했을 때 절박한 기분을 느꼈다. 페퍼는 자신이 잡아야하는 유일한 동아줄 같았다. 그녀와의 관계가 어찌어찌 잘만 유지되면 자신도 그녀 같이 평범하고 평화로운 삶에 녹아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토니는 뼛속까지 토니 스타크였다. 결국 페퍼와는 섞일 수 없었다. 페퍼는 그러한 토니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녀가 이해하는 걸 토니는 알고 있었다. 나의 소망이 사치인 것보다 그녀가 상처 입는 게 더 중한 문제다. 말은 그럴싸하다. 그러나 토니는 관계가 깨졌을 때 그녀가 상처 받은 것보다 자신이 받은 타격이 더 크다는 걸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그건 페퍼와 연애를 하기 전부터 본능적으로 느껴진 무언가였다. 어떤 상황에 어떤 행동을 하든, 어쨌든 자신은 빌어먹을 천재 백만장자 토니 스타크였으니까.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 토니는 담담한 척 시선을 피하며 난 아무렇지 않아. 그러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라고 능청스레 대답했지만 전부 틀렸다. 농담은 진담보다 쉽고 상처 받는 것보단 상처를 주는 것이 더 쉬웠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었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나는 어느 단추를 잘못 끼워 넣었는가. 혹시 그때 그게 맨 첫 단추는 아니었을까. 생각은 1/16박자로 마구 변주되는 피아노 연주마냥 정신없이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그건 방어기제와 같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만 떠오르는 캡틴 아메리카의 얼굴을 가려버리려는 보호막 같은 것. 평소보다 훨씬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하고 그 바보 같이 웃는 얼굴을 지워보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그런 기대가 들었다. 스티브 로저스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와 함께라면 혹시 내가. 페퍼나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와는 달리 그에게 애정과 관심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굶주린 거지마냥 애정을 갈구하는 것은 지긋지긋했다.

 

 고작 저런 이유 때문에, 스티브에게 연애를 하자고 말을 해버렸다. 다시 생각해봐도 한심했고, 생각이 없었고, 철도 없었다. 스티브는 가만히 토니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란 눈을 마주할 용기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눈을 피할 수도 없었다. 스티브가 대답을 하기 전에 흐르는 적막이 마치 억만년처럼 느껴졌다. 그 찰나에 토니의 머릿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괜히 말했나? 그냥 농담이라고 할까? 아냐, 여기서 농담이라고 하면 스티브는 날 인간 취급도 안 할지도 몰라. 너무 성급했나..? 페기가 죽은 지 며칠 된 것도 아닌데 연애라니 그런 생각이 아예 없을 만 하지. 아니 연애의 ㅇ자도 마음에 담아본 적 없을 게 빤한 남자다. 그래서 토니는 아니 됐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스티브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거 진심인가?”

 

 토니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농담이었다면 벌써 농담이라고 했을 거야. 난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맞추니까.”

 “그랬겠지.”

 

 스티브는 토니의 말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토니는 말을 뱉고 나서야 자신이 다른 관점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깨달았다. 나 지금 무슨 커밍아웃 한 건가? 이 노친네 그런 쪽으로 아예 생각해본 적 없는 극보수파 아냐? 그렇게 나오면 굉장히 곤란한데. 내가 완전한 그쪽은 아닌데 그렇다고 완전히 이성애자도 아니고.. 물론 플레이보이였던 토니는 남자와도 사귄 적이 있었다. 두세 번이었지만 가벼운 만남은 몇 번 더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친구나 지인으로 소개를 하고 다녀 전혀 말이 퍼진 적은 없었다. 토니는 그런 쪽에선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저 어릴 때 나타나는 일시적 정체성 혼란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게 아닌 듯 했다. 그러다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냐. 전혀 달라. 그때 만나서 연애 비스무리하게 했던 남자들과 캡틴 아메리카, 아니 스티브 로저스는 확연하게 다르다. 그냥 열 수 있는 서랍에 두는 물건과 하나 밖에 없는 열쇠로 잠가놓은 서랍에 두는 물건의 무게가 다르듯 스티브 로저스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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